시공간을 넘는 감각
확장현실(XR)의 개념과 기술 동향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등 글로벌 IT 기업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에 대한 대규모 기술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 기술들은 현실의 감각을 시공간을 넘어 확장·증폭하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들 기술을 통칭해 확장현실(XR, Extended Realit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기술들은 게임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와 융·복합을 통해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안겨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 기술의 차이는 무엇이며 각각 어떤 기술적 함의를 가질까.
virtual
현실을 지우는 몰입감, VR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장자의 호접몽이 21세기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VR(Virtual Reality)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듯 가상과 현실의 공간을 분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VR은 가상세계를 현실로 느껴지도록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인간의 감각을 속이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 인간의 오감을 제어해 현실과 분리된 가상세계 속에서 경험의 확장을 추구한다.
MBC의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은 ‘퍼펙트 센스’ 특집을 진행한 바 있다. 갖가지 장비를 동원해 멤버들의 오감을 속여 자동차에 탄 것만으로 헬기에 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식의 내용이었다. VR 콘텐츠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아직 VR이 구현하는 감각은 시각에 치중돼 있다.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HMD)를 통해 사용자의 눈앞에 디스플레이를 배치함으로써 시각을 속이는 방식이다. 오감 중 많은 감각이 비어있기 때문에 가상세계에 충분히 몰입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을 채워주는 기기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미국 VR글러브는 물체를 잡았을 때 압력을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스마트 글러브를 출시했다. 국내 스타트업 태그웨이는 지난 2월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에서 영상 속의 뜨거움과 차가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기기 써모리얼을 선보였다.
사진 | 페이스북 스페이스 홈페이지
그동안 VR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는 기술적인 한계도 있지만 높은 가격이라는 진입 장벽과 콘텐츠 부족 문제가 컸다. 하지만 지난해는 VR의 원년으로 꼽힐 정도로 다양한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 기기들이 나왔고 많은 기업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가격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VR 기기의 대표주자인 오큘러스 리프트는 599달러에서 399달러로 가격을 낮췄으며 HTC 바이브는 기존 799달러에서 599달러까지 헤드셋 가격을 내렸다. 또한 오큘러스 고 등 보다 값싼 가격의 VR 기기들이 나오고 있다. 덕분에 판매량도 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캐널리스에 따르면 올 3분기 VR 헤드셋 출하량이 처음으로 100만 대를 넘었다.
콘텐츠의 경우 게임 중심에서 다양한 산업군으로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제조·교육·의료·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VR은 실재감을 바탕으로 현장에 투입되기 전 훈련용으로 사용된다. 건축업계에서도 시공주나 구매 예정자에게 프레젠테이션용으로 활용된다. 또한 설계단계에서 평면 화면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건축물의 실제 크기를 가늠할 수 있어 검토용으로 사용된다.
소셜 네트워크 기업도 적극적으로 VR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높은 몰입감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와 공감을 높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페이스북은 영상 이후의 차세대 콘텐츠로 VR을 꼽으며 꾸준히 투자해왔다. VR 플랫폼 페이스북 스페이스는 아바타를 통해 다양한 가상공간을 오가며 친구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게 한다. 팀 스위니 에픽게임즈 CEO는 카메라와 센서 기술의 발전으로 감정적인 교류가 더욱 세밀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신체와 안면을 스캔하고 실시간으로 렌더링해 자신을 대리하는 현실감 있는 아바타를 내세워 보다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할 거라는 설명이다.
Augmented
현실 위에 입혀진 AR
VR의 장점이자 단점은 몰입을 위해 현실과 단절된다는 점이다. 현실세계와 완전히 차단되기 때문에 일상에서 편하게 접근하기 힘들다. 반면 AR(Augmented Reality)은 현실세계 위에 가상정보를 입혀주는 기술이다.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적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스카우터나 영화 <아이언맨>에서 아이언맨 슈트를 착용한 토니 스타크가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AR 웨어러블 기기로는 구글 글래스가 있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AR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업체는 애플이다. 팀 쿡 애플 CEO는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것처럼 AR 경험은 일상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라며 AR의 잠재력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해왔다. VR과 달리 AR은 현실과 조화롭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애플은 최근 프라임센스, 페이스시프트, 메타이오 등 여러 VR·AR 관련 회사를 인수해 AR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해왔다. 결국 애플은 아이폰에 AR 기능을 집어넣었다. 애초 기대됐던 구글 글래스 같은 새로운 하드웨어 제품을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폰을 매개로 세계 최대의 AR 플랫폼을 구축한 것이다.
현실에 가상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AR은 정교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어색하지 않게 가상 이미지를 녹여내는 게 관건이다. 애플은 ‘아이폰8’과 ‘아이폰X’에 탑재된 ‘A11 바이오닉’ 칩셋과 향상된 카메라 등 하드웨어적 성능을 비롯해 AR 개발도구 ‘AR키트’를 제공해 자연스러운 AR 경험을 전달한다. <블룸버그>의 보도에 따르면 애플은 2020년 출시를 목표로 AR 헤드셋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은 AR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AR은 신기하지만 쓸모없는 미래지향적 기술 정도로 여겨지곤 한다. 지난 수년간 성공한 AR 콘텐츠는 ‘포켓몬고’가 유일하다. 콘텐츠가 확실히 준비되지 않으면 이런 인식을 뛰어넘기 힘들 것이다.
사진 | 모바일 AR 게임 포켓몬고(www.shutterstock.com)
Mixed
VR과 AR을 혼합한 MR
VR과 AR은 일장일단이 있다. VR은 몰입감은 높지만 현실과 괴리된다. AR은 현실 위에 가상 정보를 덧입히지만 보고 체험할 수 있는 화면 크기가 한정돼 있어 상대적으로 몰입감이 떨어진다. 이런 VR과 AR의 한계를 넘어 두 기술의 장점을 합친 게 MR(Mixed Reality)이다. MR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융합하는 기술이다. 《VR 비즈니스》의 저자 신 기요시는 MR을 현실과 가상의 CG가 구별되지 않는 세계라고 정의한다.
MR의 대표주자로는 매직리프 사가 있다. 이 회사는 체육관에 가상의 고래가 등장해 실감나게 헤엄치는 영상을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매직리프 사는 기술적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잠재력을 인정받아 구글과 알리바바 등 글로벌 IT 기업으로부터 14억 달러를 투자받았다. 다음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홀로렌즈가 있다. 2016년에 공개된 홀로렌즈는 MR 기반 웨어러블 장치로 기존 VR 기기처럼 시야를 완전히 덮는 방식이 아닌 반투명한 디스플레이를 통해 주변 환경을 볼 수 있도록 한 장치다.
전문가들은 향후 VR과 AR이 MR로 통합될 것으로 전망한다. 현재는 가상의 세계만을 보여주거나 현실에 가상의 정보를 입혀주는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융합이 자유로워질 거라는 관측이다. VR과 AR 관련 해외 특허도 급증하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VR·AR 핵심 기술 관련 해외 특허는 최근 10년간 전 세계에 3111건 출원됐다. 2007년 출원 건수는 110건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716건에 달했다. 연평균 증가율은 23.1%이다. 기술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상과 현실, 그 사이의 혼합현실은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을 넘어 대중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글 이기범(블로터 기자)
영상 | 매직리프의 MR 기술 데모 동영상(매직리프 공식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