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저녁은 안녕하신가요?
트렌드 읽기
워라밸 세대의
저녁 활용법
오는 7월부터 300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우선 실시되는 주 최대 52시간 근로 방침과
워라밸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퇴근 후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워라밸 현상은 무엇이며, 이들의 저녁이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인지 들여다보자.
Work&Life
워라밸, 트렌드를 넘어 장기적인
삶의 가치로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인 이 신조어가 공공연하게 쓰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워라밸’,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은 상상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OECD 회원국 중 근로자 평균 근로시간이 2위에 해당하고, 도시의 야경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근원이 야근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이 나오는 한국에서 야근 대신 정시퇴근하여 개인 시간을 가진다는 건 어지간한 담력의 소유자이거나 ‘승진 포기자’ 아니고서는 못할 일이었다.
요즘은 다르다. 일한 만큼 성과가 주어지고 도처의 개천에서 용이 솟아오르던 고성장시대는 끝났다. 예전에는 열심히 좋은 직장에 들어가 승진하며 꼬박꼬박 저축하면 내 집 마련하며 잘 사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일 원 한 푼 축내지 않고 월급을 십 수 년 모아야 서울에 집을 살까 말까 한 시대가 됐다. 이런 저성장시대에는 직장 선택 기준과 삶의 가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보다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집중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추구하는 ‘워라밸 세대’가 출현하게 된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가 펴낸 책 <트렌드코리아 2018>에서는 1988년부터 1994년 사이 출생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을 ‘워라밸 세대’로 명명한다. 이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축(회사의 가축처럼 일하는 직장인이란 뜻의 신조어)’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난을 통과했음에도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27.7%(2016년 기준)에 달한다는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워라밸 세대’는 내 삶이 없는 업무량 많은 고연봉 회사보다는 복지가 잘 되어 있고 개인의 삶을 존중받을 수 있는 이른바 ‘워라밸 기업’을 선호한다. 게다가 오는 7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로 근로시간이 단축되면서 ‘워라밸’은 한 세대의 트렌드를 넘어 장기적인 삶의 가치로 자리 잡는 추세다.
출처_닐슨코리아(2017년 12월, 전국 성인남녀 1,000명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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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와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다
휴식을 게으른 것으로 치부하던 과거 세대와 달리 ‘워라밸 세대’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욜로(You Only Live Once)’라는 슬로건과 함께 휴식을 적극적으로 소화하곤 한다. 특히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새로운 것을 즐기고 배우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가장 쉽고 보편적인 취미활동이 운동인데, ‘워라밸 세대’가 선호하는 운동은 기존과 좀 다르다. 그간 운동 좀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달리거나 요가나 필라테스 등의 정해진 강좌에 혼자 참여하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같은 목표와 취향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그룹을 지어 함께 운동을 즐기는 방식이다. 이들은 퇴근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기반으로 크루를 조성하여 함께 야밤의 도심을 달리거나, 풋살이나 농구 등의 스포츠를 즐기는데, 밤에 운동한다 하여 ‘나포츠(Night+Sports)족’이라 부르곤 한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나포츠족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유아용품 회사의 홍보마케팅 팀장으로 근무하는 김수현 씨(42)는 친구의 권유로 러닝을 시작한지 3년이 넘었다. 달리기에 구력이 붙은 이후로는 오프라인 동호회 앱서비스 ‘소모임’을 통해 러닝 동호회에 들었고, 이들과 함께 동호회 활동은 물론 각종 야간 시티러닝, 트레일러닝에 참여하고 있다. 몇 달 전에는 제주도에서 트레일러닝을 즐겼는데, 삼나무가 끝없이 이어지는 사려니숲길위를 달리는 호사를 맛보았다며 다음 기회에도 꼭 참가하리라 벼르고 있다. 물론 수현 씨나 그의 지인들이 모두 ‘워라밸’이 충분히 좋은 회사를 다니는 것은 아니다. “저도 남들처럼 주에 한두 번은 야근하는 직장인입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일에만 매진했더니 남은 건 노화와 디스크변성증 초기 증상뿐이더라고요. 제 스스로 저를 아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30대 후반에서야 얻었고, 그때부터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다 달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작년 하반기 서현진, 양세종 주연으로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사랑의 온도>는 남녀 주인공이 야간에 도심을 달리는 러닝클럽을 통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었을 정도로, 일을 마치고 난 후의 저녁시간을 활용해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빠르게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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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문화센터, 원데이클래스를
찾는 직장인들
자기계발형 취미활동도 운동만큼이나 워라밸족에게 인기 있는 활동이다. 어릴 적부터 예체능 계열의 취미활동을 적극 권장하는 서양문화와 달리 학창시절 내내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고 대학을 거쳐 취업까지 성공한 한국 사람들은 슬프게도 내 취미가 무엇이고 어떤 것에 관심과 재능이 있는지 아득한 경우가 많다. 원데이클래스처럼 짧은 시간에 뭔가를 배우고 심지어 결과물을 내는 프로그램은 광활한 취미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안내하는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외국계 화장품회사 온라인마케팅을 담당하는 정하연 씨(29)는 올해 들어 소셜 액티비티 플랫폼 ‘프립’을 이용해 세 번의 원데이클래스를 경험하고 큰 만족을 얻었다. 하연 씨 같은 사람들을 위해 외국어와 악기 연주, 공예 등 각종 자기계발형 취미활동들이 ‘프립’, ‘플라이어스’, ‘탈잉’ 등 여러 취미 공유 플랫폼을 가득 채우고 있어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재능 공유 플랫폼 ‘탈잉’, 소셜 액티비티 플랫폼 ‘프립’이 워라밸 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출처_각 기업 공식 홈페이지)
취미를 찾는 워라밸 세대를 위한 콘텐츠는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 백화점 문화센터 업계가 대표적이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강좌를 수강한 20~30대 소비자 수는 전년 동기(2017년 12월 기준) 무려 150% 가량 급증했으며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경우 IT기업들이 밀집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지역 내 기업 및 단체들과 연계해 직장인 고객에 대한 맞춤형 강좌를 올 여름학기부터 운영할 예정이다.
백화점 문화센터는 물론 소셜커머스 업체에서도 원데이클래스 판매에 적극적이다. 제약회사 윤지강(31) 씨는 지난달 소셜커머스를 통해 사격 원데이레슨을 구매해 여자친구와 함께 사격을 배우며 독특한 데이트를 즐겨 만족을 얻은 케이스. “다음 번에는 원데이 드럼레슨을 구매해 볼 생각이에요. 합리적인 비용으로 취미와 이색 데이트를 동시에 즐길 수 있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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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이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는
워라밸 세대
그런가 하면 이직과 창업 등 진지하게 다른 삶을 준비하는 워라밸족도 있다. 직장인이지만 퇴사 이후의 삶을 미리 준비하고 공부 중인 학원강사 김인숙 씨(33)도 그 중 하나다. 대형 영어학원에서 일하는 그녀는 수입은 높지만 그만큼 업무 강도와 스트레스가 심해 40대 중반 이후로는 다른 일을 찾을 생각이다. “요즘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인기잖아요. 제가 가진 능력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 중에 ‘퇴사학교’를 알게 됐어요. 요즘은 이직이나 창업을 위해 퇴사를 하는 데도 단기간이 아닌 수년의 시간을 들이는 추세라 하더군요. 다양한 업종의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순히 창업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달라짐을 느끼기에 꾸준히 여러 수업을 들어볼 생각입니다.”
중요한 건 밸런스다. 일과 삶에서 어느 정도로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 계산이 나오면 일을 제외한 삶에서 자신이 어떤 것을 추구하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운동이든 교육이든, 정시퇴근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워라밸 세대’는 어떤 현재를 즐기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빠르게 캐치해 자신의 삶을 가꾸는 중이다.
글 _ 정수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