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과 과학이
문화가 되는 법
특별한 만남
긱블
박찬후 대표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스타트업들이 핫하다.
그중에서도 긱블은 공학과 과학을 주제로 기존에 없던 콘텐츠들을 선보이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준다.
공학과 과학은 어렵고 따분할 것 같다고?
속는 셈 치고 영상을 한 번 클릭해보시라.
공학과 과학이 이렇게 쿨하고 멋진데 웃기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에 반해버리고 말테니.
MAKER
메이커 문화에 불어 닥친 새로운 바람
과거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만든다’는 개념이 최신기술로 실현된다. 맘만 먹으면 누구나 3D 프린터를 빌려 사용할 수 있고, 인터넷에는 지식과 소스가 넘쳐난다. 전기전자, 로보틱스 등의 엔지니어 기술과 공예 같은 전통적인 활동을 연결해 개개인이 아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메이커 문화에 민트향처럼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이 있으니, 바로 ‘긱블’이다. 첫 콘텐츠는 2017년 3월에 페이스북에 올린 ‘양덕도 울고 갈 소화기로 만든 아이언맨 광자포’다. 3D 프린팅을 이용하고 센서와 회로를 부착하며 소화기를 개조한다. 이 영상 하나로 페이스북 구독자가 0명에서 반나절 만에 3,000명을 찍었다.
소화기를 개조해 만든 아이언맨 광자포
(출처_긱블 유튜브 공식 채널)
영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에 등장하는 불을 내뿜는 건틀렛, 시끄럽게 떠드는 초등학생을 제압하는 킹스맨 우산총, 시험공부에 지쳐 조는 이를 호되게 깨워주는 마동석 로봇까지. 영화 <해리포터>에서 생각을 읽는 기숙사 모자는 두피열을 측정해 탈모 진단을 해주는 기능이 있고,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 그라가스의 술통은 원격 조종이 가능하며 술까지 발사한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개구리 페페는 ‘중간고사’ 같은 슬픈 단어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는 음성인식 정수기로 탄생했다. 구글 음성인식 API를 적용했다고.
자르고 붙이고 회로를 설계하고 모터와 부품, 센서를 조립해 로봇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은 상상이 실현되는 마법 같은 순간들을 보는 일이라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은 물론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 긱블의 슬로건 역시 ‘공학의 멋짐을 알린다’는 거다. 그리고 다 떠나서 웃기다. 이렇게 지적인 콘텐츠에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함까지 느껴진다. 수많은 영상 콘텐츠가 쏟아지는 이 시대에 이런 게 진짜 콘텐츠의 가치는 아닐까. 긱블의 진짜 생각이 궁금했다. 성수동에 있는 긱블 스튜디오를 직접 찾아갔다.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 등장하는 그라가스의 술통을 만들었다.
(출처_긱블 유튜브 공식 채널)
SCIENCE & ENGINEERING
호기심은 과학으로,
상상력은 공학으로
긱블은 Geek(괴짜)과 able(할 수 있다)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긱’들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포항공과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찬후 대표는 전기전자공학과 김현성 이사 등을 모아 2017년 포항공대 캠퍼스 내에서 긱블을 창업했다. 미디어 스타트업 전문 액셀러레이터인 메디아티로부터 시드 투자를 받았다. 설립 1년 여 만인 현재 유튜브 구독자 수는 8만6천 명(2018년 8월 기준). 콘텐츠 가치 하나만으로 네이버로부터 5억 원, 신기술펀드 ‘소란’으로부터 3억 원을 투자받았고, 100평 규모의 스튜디오도 서울에 마련했다. 박찬후 대표는 2018년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리더 30인(2018 Forbes 30 Under 30 Asia)’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튜버들이 뜨고 있다고 하니, 공대생도 이런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잘 될 줄은 사실 몰랐죠. 하지만 공학으로 재미있는 걸 해보자는 목표는 분명했어요. 다행히 첫 콘텐츠의 반응이 좋았고, 그 다음 콘텐츠를 만들어가면서 점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좀 더 본질적인, 그러니까 ‘과학은 무엇인가’, ‘대중문화는 무엇인가’ 같은 고민을 하면서 시장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박찬후 대표는 미술, 음악, 스포츠처럼 공학이 즐거울 수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공학을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긱’들이 ‘주인공’이 되보자는 포부였다.
“이런 콘텐츠에 대한 갈증은 분명히 존재했다고 봐요. 물론 공학이 겨냥한 욕구는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것은 아니에요. 시청자 입장에서 푸드나 뷰티 콘텐츠보다 재미있거나 인기를 끌기는 어려운 거죠. 하지만 사회와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존욕구를 넘어 성장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앞으로 더 고차원적인 욕구를 자극하고 충족하는 콘텐츠들이 주목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늘 궁금해 한다. 그리고 상상한다. 궁금한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과학, 상상을 해결해주는 것은 공학인 것이다. 박찬후 대표는 콘텐츠 하나를 만드는 데도 이러한 치열한 고민들을 기반에 둔다. ‘긱블의 영상은 재미있다’고 말을 건네자 재미는 너무 추상적인 말이라며 재미까지 계산할 줄 알아야 한단다. 플랫폼 성격에 따른 영상의 길이, 영상을 클릭하고부터 끝날 때까지 각 시간대별 영역의 템포나 리듬 등의 전략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사람들의 본능을 계산해 충족시켜주는 공학 콘텐츠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푸드와 공학, 뷰티와 공학을 융합한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GEEKBLER’s CONTENTS
긱블만의 콘텐츠가 만들어지기까지
긱블이 만드는 콘텐츠는 크게 카테고리화되어 있다. 앞서 말했던 아이언맨 광자포 등이 등장하는 영상은 모두 ‘어제 만든’이라는 코너에 속한다. 영화, 게임에 등장하는 물건들을 각종 기술을 동원해 실제로 만든다. ‘정말 중요한 질문들’이라는 코너는 자연과학을 다룬다. ‘핵이 터질 때 삼겹살은 어디쯤에서 익을까?’라는 영상이 대표적이다. 엉뚱한 질문을 통해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데, 고퀄리티의 2D 모션그래픽을 동원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기업과 컬래버레이션해 영상을 만드는 코너도 있다. 퀄컴과 협업해 부르기만 하면 찾아오는 육발이 리모콘, 레이저 적외선 센서를 장착한 얼굴인식 선풍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퀄컴의 사물인터넷용 스냅드래곤 410E 플랫폼을 탑재한 것들이다. 그럼 이 신박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아이디어를 구현할 때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저희가 콘텐츠 제작 주기가 따로 없는 이유죠. 주기를 정하면 기본적인 레벨의 작품밖에 만들지 못하거든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의 건틀렛은 원래 전기를 쏘는 거였는데, 마지막에 고장이 나버려 불을 쏘는 방식으로 바꾼 거예요. 전기 쏘는 건틀렛을 4주간 만들었는데 말이죠. 아예 업로드 하지 못한 것들도 많고요.”
긱블 스튜디오는 한쪽에서는 촬영을, 한쪽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는데 청년들의 생기와 웃음소리 그러나 진지함이 가득했다. 창업 당시 직원 3명에서 17명으로 늘어난 긱블은 대외협력 등을 담당하는 비즈니스랩, 메이킹 설계 등을 담당하는 테크랩, 메이킹 외의 영상들을 담당하는 콘텐츠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확고한 조직문화가 있다. 바로 회의는 효율적으로, 출근은 엄하게. 정해진 시간 내에 모여 혼자라면 할 수 없는 일, 모여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서로 도우며 하기 위해서다.
“콘텐츠 제작에 있어 주제 선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디어를 잘 고르는 거죠. 내부적으로 ‘아이디어는 모두의 것’이라는 슬로건을 갖고 있어요. 영상을 만드는 감독이 혼자 아이디어를 내고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소집해 반드시 아이디어를 나눠요. 대신 아무말 대잔치가 되는 비효율적인 회의는 하지 않아요. 포스트잇에 각자 아이디어를 적어 내놓으면 회의를 주최하는 감독이 의견을 골라 듣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공학도이던 그가 미디어 스타트업을 창업한 것은 구글 뉴스랩에서 펠로우십을 했을 때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에서 생각 없이 보던 영상들이 애플리케이션처럼 여러 사람의 협업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기술로만 스타트업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학과 과학으로 문화를 만들고자하는 스타트업의 경영자로서 박찬후 대표는 인재상에 대한 철학도 남다르다. 매순간 의미를 찾는 사람, 자신의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다. 능력은 그 다음이다. 이 특별한 긱블러들이 모인 긱블은 공학과 과학의 즐거움을 알아주는 시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시행착오를 끊임없이 견디며 오늘도 새로운 콘텐츠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THE NEW FUTURE
디지털 콘텐츠의 미래를 고민하다
긱블의 오프라인 사업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해 포항시, 서울시, EBS와 함께 워크숍을 개최한 바 있다. 아두이노와 적외선 센서를 이용한 ‘마법 지팡이 만들기’, 아두이노와 MP3 모듈을 이용한 ‘전자오르골 만들기’ 등을 진행했다. 그들의 콘텐츠를 보고 과학에 흥미를 갖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참여와 소통의 장으로 끌어와 과학 경험을 제공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긱블은 이러한 과학 경험의 모델을 보다 확장하기 위해 올 9월 오프라인과 연계한 플랫폼을 론칭한다. 긱블의 콘텐츠와 관련된 과학 액티비티 프로그램, 강연, 페스티벌 등을 예약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과학 관련 교육이나 워크숍을 진행하는 이들과 구독자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음악 시장은 음원과 콘서트 티켓을 판매하고, 스포츠 시장은 경기장 관람 티켓을 판매해요. 하지만 미디어 시장에는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재화가 없어요. 광고나 브랜드 협업이 거의 전부죠. 콘텐츠를 소비하는 주체와 돈을 지불하는 주체가 다른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과학 콘텐츠 분야의 재화를 만드는 시도를 하고자 합니다. 특히 교육 시장과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가능성은 무척 크다고 봅니다.”
이처럼 단순히 콘텐츠가 인기를 끌거나,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만이 긱블의 목표는 아니다. 박찬후 대표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린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시대, 이 새로운 시대에 긱블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20~30년 내 예상치 않은 변화가 더 많이 생길 거라고 봐요. 가장 가까운 변화는 일자리겠죠. 사람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원론적인 질문을 하는 날이 꼭 오게 될 거고요. 긱블은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데이터를 꿈꿉니다. 산업혁명이 철에서 전기로 넘어왔다면 지금은 데이터로 넘어오는 중이라고 보거든요. 데이터를 만드는 게 일이 되고 산업이 되는 거죠. 긱블이 이 변화한 산업의 리더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영화 <분노의 질주 : 더 세븐>의 이야기를 꺼냈다. <분노의 질주 : 더 세븐>은 촬영 중 사망한 폴 워커를 디지털 기술로 재현해 출연시켰다. 그리고 폴 워커라는 배우의 이름을 넣고, 배우 폴 워커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람의 캐릭터와 정체성을 계속해서 끌고 갔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데이터라는 게 이런 건 아닐까요. 물론 여기에 모순은 존재해요. 가상의 사람을 만들어 보여줘도 진짜 사람과 거의 구분이 불가하거든요. 또 사람이 만든 데이터와 기계가 만든 데이터를 구분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도 있고요. 저는 어쩌면 지금 세대가 ‘사람으로서’ 데이터를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일 수도 있다고 봐요. 특이점이 오면 기계와 사람의 데이터가 완전히 구분 불가할 거예요. 디지털에서 ‘사람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은 더 깊어지겠죠.”
아직 정답을 모르지만 ‘사람의 데이터’는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 끝까지 가보고 싶단다. 그렇게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그저 재미있는 공학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라는 인상이 뒤집어지는 듯했다. 박찬후 대표의 질문이 큰 울림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긱블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대의 콘텐츠는 또 어떤 모습일지 어서 클릭하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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